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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말과 18세기 초는 유럽의 미술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의 미술은 각기 다른 특색을 가지고 발전하였으며, 이들 지역의 미술은 바로크와 로코코라는 두 가지 주요 양식의 영향을 받아 변화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왕실과 귀족의 후원이 큰 역할을 하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종교적 전통과 민속적인 요소를 잘 조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미술의 변화는 유럽의 문화적 풍토와 사회적 맥락을 반영하며, 당시 사람들의 감성과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프랑스미술: 왕실 후원의 화려한 시대

    프랑스 미술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까지 왕실과 귀족의 후원 아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바로크 양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로코코 스타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바로크 양식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로코코 스타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바로크 미술은 극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이 특징인 반면, 로코코는 더 부드럽고 장식적인 성격을 띠었다. 특히 루이 14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미술을 국가적 상징으로 여겼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했다. 

     

    '여름의 축제' (Fête Galante)- 장-앙투안 와토 (Jean-Antoine Watteau) / 사진 위키피아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는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과 앙드레 샤르댕(Jean Antoine Watteau)이 있다. 푸생은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며, 명확한 구도와 차분한 색감을 통해 미술의 전통을 계승했다. 그의 작품은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와토는 로코코의 대표적인 화가로,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장면과 사랑, 우아한 사교 활동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특히 '향연'이라는 장르는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미술 장르로, 귀족들의 여가 생활을 즐겁고 화려하게 그려냈다. 이 시기 프랑스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왕실과 귀족들이 후원하는 예술의 다양성과 수준이었으며, 이로 인해 미술이 사치스럽고 화려해졌다. 왕실의 후원 아래 미술가들은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뛰어난 작품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미술의 발전은 단순히 예술에 그치지 않고, 이후 유럽 전역의 미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미술: 종교와 미속의 조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보트 파티의 점심 식사> /사진 위키피아

     

    독일의 미술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정치적, 종교적 격변 속에서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 독일은 종교개혁과 30년 전쟁의 여파로 인해 여러 갈래로 나뉘었고, 각 지역의 미술가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독일의 미술은 종교적 주제를 많이 다루었지만, 민속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어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와 같은 선조들의 영향을 받아, 그 후의 화가들은 자연과 인간의 삶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독일의 미술가들은 종교적 성격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고뇌와 희망을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은 개신교 화가들은 신앙과 자연을 결합하여 독창적인 주제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교회 장식물이나 제단화에서 풍부한 색채와 생동감 있는 인물 묘사를 통해 그들의 신념을 전달하고자 했다. 

     

    18세기 초에는 바르트홀드 부론이 독일의 초기 로코코 양식을 이끌며, 종교적 주제 외에도 사랑과 자연을 다룬 경쾌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형태와 부드러운 색채로 감정을 잘 표현하였고, 이는 나중에 로코코 미술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 미술은 종교적 상징과 민속적인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매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오스트리아 미술: 궁정 문화의 영향

    오스트리아 미술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특히 비엔나에서 궁정 문화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오스트리아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입지를 다지면서 미술엣도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추구했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의 미술은 바르크 바리크 양식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전환을 겪으며, 귀족과 왕족의 후원 아래 다양한 예술이 융햡되는 시기였다. 요한 아인리히 슈페르(Johann Heinrech Schönfeld)와 같은 화가들은 이 시기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다양한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슈페르는 비엔나 성당의 벽화와 장식물을 통해 바르크 양식의 화려함을 잘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극적인 구도를 사용하여 종교적 주제를 표현하며,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오스트리아 궁정 문화는 미술뿐만 아니라 음악과 문학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이루었으며, 이는 유럽 전체에 걸쳐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비엔나에서 발전한 음악과 미술은 서로 영향을 주며 조화를 이루엇꼬, 이는 오스트리아가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시대적 배경: 사회적 변화와 미술의 상관관계

    17세기 말과 18세기 초는 유럽에서 사회적, 정치적 변화가 격력하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 이후 발전한 인문주의는 더욱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예술가들은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한, 귀족과 왕실의 후원 아래 예술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상징하는 도구로 변모하였으며, 이는 미술의 주제와 기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삶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미술의 경향에도 반영되었다. 바로크 미술의 극적인 표현에서 로코코의 경쾌하고 화려한 장식으로의 전환은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나타내는 중요한 예시이다. 귀족과 왕실은 화려한 사교 활동을 즐기며, 이를 예술로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로 인해 미술은 더욱더 사치스럽과 장식적인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과학과 철학의 발전도 미술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는 뉴턴의 중력 이론과 같은 과학적 발견이 이루어졌고, 이는 인간의 사고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변화는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주제를 제공하였고, 미술에서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되었다. 미술은 단순한 사각적 경험을 넘어,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사람들은 미술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사회적 이슈를 논의하는 장으로 삼았다. 이러한 점에서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의 미술은 단순한 작품을 넘어서 시대의 거울이자, 미래의 예술을 위한 초석이 되었다.